
1977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22세 청년 빌리 밀리건이 체포됐을 때 수사관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금방 알아챘습니다. 용의자가 심문 도중 말투와 지능, 심지어 시력까지 바뀌었으니까요. 저도 처음 이 실화를 접했을 때 솔직히 꾸며낸 이야기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파고들수록, 이건 영화보다 훨씬 더 불편하고 복잡한 현실이었습니다.
24개의 인격이 실재했다는 것 — 빌리 밀리건과 DID의 구조
빌리 밀리건 사건의 핵심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DID,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라는 진단에 있습니다. DID란 하나의 개인 안에 두 개 이상의 독립적인 인격 상태가 존재하며, 각 인격이 의식·기억·행동을 별개로 통제하는 정신 질환입니다. 쉽게 말해 같은 몸 안에 여러 명의 '다른 사람'이 번갈아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정밀 심리 검사 결과, 빌리의 내면에는 무려 24개의 인격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특히 주목한 건 각 인격의 구체성이었습니다. 단순히 성격이 다른 수준이 아니라, 모국어가 다르고 시력 수치가 다르며 좌뇌·우뇌 우세도까지 달랐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인격들 중 일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아서: 냉철하고 지적인 영국인 인격으로, 내면의 다른 인격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 레이건: 폭력 성향을 가진 유고슬라비아 출신 인격으로, 영어 대신 세르보크로아트 어를 사용했습니다.
- 아달라나: 외로움을 타는 여성 인격으로, 실제 범행을 저지른 인격 중 하나로 지목되었습니다.
- 대니: 겁이 많은 14세 소년 인격으로, 트라우마 기억의 파편처럼 존재했습니다.
빌리는 어린 시절 양부로부터 반복적인 신체적·성적 학대를 받았습니다. 정신의학계에서는 이처럼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해리 기제를 촉발시켜 DID로 발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해리 기제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정신의 방어 반응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빌리의 24개 인격은 단순한 '증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인간 정신이 선택한 극단적인 보호 전략이었던 셈입니다.
빌리 밀리건은 1977년 재판에서 DID를 근거로 미국 역사상 최초로 중범죄에 대해 정신이상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미국정신의학협회(APA)의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DSM-5)에 따르면, DID는 현재까지도 진단과 치료가 어려운 복합 해리 장애로 분류되어 있으며, 전 세계 유병률은 인구의 약 1~3%로 추정됩니다(출처: 미국정신의학협회 APA). 제가 이 수치를 보고 적잖이 놀랐던 건, 생각보다 결코 드문 일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영화가 소비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가 놓친 질문 — 비스트와 케이시의 의미
영화 <23 아이덴티티>(Split, 2016)는 이 실화에서 영감을 받아 케빈 크럼브라는 인물을 창조했습니다. 23개의 인격을 가진 케빈, 그리고 그 위에 군림하는 24번째 인격 '비스트'는 DID를 스릴러 장르의 문법으로 재해석한 결과물입니다. 저는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제임스 맥어보이의 연기에 압도당해서 질환 자체에 대한 불편함을 한동안 미처 못 느꼈습니다. 그런데 빌리 밀리건의 실화를 공부하고 나서 다시 보니 영화가 선택하고 버린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영화가 가장 크게 비약한 지점은 비스트라는 인격에서 입니다. 비스트는 초인적 근력과 세포 재생 능력을 가진 존재로 등장하는데, 이는 의학적 근거가 있는 설정과 그렇지 않은 설정이 뒤섞인 결과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정신 상태가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의학적으로 어느 정도 증명되어 있습니다. 해리 상태에서 각 인격마다 혈압, 심박수, 심지어 알레르기 반응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임상 보고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영화의 비스트는 이 경계를 훨씬 넘어 초자연적 영역으로 진입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과학적 과장은 관객에게 짜릿함을 주는 동시에, DID 환자를 잠재적 괴물로 인식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한편 저는 케이시라는 캐릭터에 훨씬 더 오래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삼촌에게 반복적으로 학대받으며 자해까지 하게 된 케이시의 이야기는 영화의 스릴러 구조 안에서 자칫 묻힐 수 있는 지점입니다. 케이시는 생존을 위해 움츠러드는 쪽을 선택했고, 케빈은 인격을 분열시키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극단적으로 달라 보이는 두 선택이 사실은 같은 출발점에서 비롯됐다는 것, 이게 영화가 스릴러의 외피 안에 숨겨둔 가장 진지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DID에 관한 대중의 오해를 바로잡는 데 있어 정확한 정보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국제 트라우마 및 해리 학회(ISSTD)는 DID 환자의 대다수가 타인을 향한 폭력이 아닌 자해나 회피 행동을 보이며, 범죄 가담률이 일반 인구 대비 높지 않다고 밝히고 있습니다(출처: ISSTD). 영화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실제 임상 현실 사이의 간극이 적지 않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23 아이덴티티>는 M. 나이트 샤말란의 언브레이커블 3부작 중 제2편으로, 스릴러로서의 완성도는 분명히 높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동일한 질문이 남습니다. 고통받은 사람의 정신이 만들어낸 구조물을 공포의 소재로 소비하는 것, 그게 과연 충분한 시선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빌리 밀리건의 기록을 먼저 읽어본 뒤 영화를 보시길 권합니다. 같은 장면이 전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케이시 삼촌처럼 가면 뒤에 숨은 비스트와 케빈처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비스트, 둘 중 어느 쪽이 더 두려운지 그 답도 아마 달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