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어로 영화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한 번쯤 이런 고민을 해보셨을 겁니다. "마블도 DC도 아닌, 뭔가 다른 결의 영화 없을까?" 저도 똑같은 고민을 하다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헬보이 시리즈를 다시 꺼내 봤습니다. 그리고 처음 봤을 때는 그냥 괴물 때려잡는 영화인 줄 알았는데, 두 번째부터는 전혀 다른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다크 판타지 히어로물이 이 정도 완성도를 낼 수 있는 이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헬보이는 단순히 "이상하게 생긴 히어로가 나쁜 놈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캐릭터 비주얼에만 눈이 갔는데, 다시 보고 나서야 서사 구조가 얼마나 촘촘하게 짜여 있는지 실감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실물 특수 분장(Practical Effects)의 활용입니다. 여기서 Practical Effects란 CG가 아닌 물리적인 분장, 소품, 세트를 사용해 화면에 실재하는 것처럼 연출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20년이 넘은 영화인데도 화면에서 조잡함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디지털이 아닌 실제 질감이 카메라에 잡히니까요. 제가 직접 다시 봤을 때, CG 의존도가 높은 최근 히어로물과 비교하면 오히려 헬보이의 피부 질감이나 크리처의 움직임이 더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헬보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내러티브(Narrative) 구조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Narrative란 등장인물의 행동과 갈등이 이야기 안에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는지를 설계한 서사 구조를 의미합니다. 헬보이는 세상을 파멸로 이끌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캔 맥주를 마시고 고양이를 아끼는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 간극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긴장감의 원천입니다. 론 펄먼이 이 역할을 연기하지 않았다면 이 긴장감이 살아남았을지 의문입니다. 제 경험상 배우와 캐릭터의 싱크로율이 이 정도로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헬보이가 속한 초자연 조사국(BPRD)이라는 설정도 영화의 세계관을 단단하게 받쳐줍니다. 현실에서도 이와 유사한 발상이 있었는데, 1960년대 영국 요크셔에서 발생한 이른바 '블랙 모크(Black Monk)'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물건이 허공을 날아다니고, 정체불명의 검은 형체가 가족들을 위협했다고 전해지는 이 사건에는 당시 수많은 조사관과 연구자들이 방문했지만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BPRD 같은 기관이 현실에도 필요하다는 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헬보이 시리즈의 핵심 매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운명과 자유의지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내면 서사
- CG 의존을 최소화한 Practical Effects 중심의 크리처 디자인
- 다크 판타지와 히어로물의 장르적 경계를 허무는 세계관 설계
- 론 펄먼의 캐릭터 해석이 만들어낸 대체 불가능한 존재감
리부트가 실패한 이유, 그리고 원작이 여전히 살아있는 이유
2019년 리부트판 헬보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도 개봉 당시 기대를 품고 봤다가 꽤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고어(Gore) 연출이라는 장르적 도구에 지나치게 기댄 결과, 정작 서사가 빠진 껍데기만 남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고어 연출이란 신체적 폭력이나 잔혹한 장면을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연출 방식을 말합니다. 이런 기법 자체가 나쁜 건 아닌데,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가 되어버리면 관객은 금방 피로해집니다.
원작 코믹스가 가진 분위기를 '철학적 그로테스크(Philosophical Grotesque)'라고 표현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여기서 Philosophical Grotesque란 기이하고 불편한 외형이나 상황을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는 표현 방식입니다. 델 토로 감독의 연출은 이 지점을 꽤 정확하게 포착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반면 2019년 리부트판은 그 철학적 깊이를 포기하고 자극적인 비주얼만 가져가려 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선택은 팬덤의 반응에서 곧바로 드러납니다. 영화 리뷰 집계 사이트 Rotten Tomatoes 기준으로 델 토로의 헬보이 2004년판은 신선도 86%를 기록한 반면, 2019년 리부트판은 17%에 그쳤습니다(출처: Rotten Tomatoes).
결국 헬보이 리부트 실패가 남긴 교훈은 장르물에서 미장센(Mise-en-scène)이 얼마나 중요 한가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세트, 의상, 배우의 동선까지를 통합적으로 설계하는 영화 연출의 핵심 개념입니다. 델 토로는 이 미장센을 통해 어둡고 기괴한 세계관을 유지하면서도 관객이 캐릭터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습니다. 그 균형이 원작 두 편이 20년이 지나도 회자되는 이유라고 봅니다. 영화 전문 매체 IMDb에서도 헬보이 2004년작은 7.0 이상의 평점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습니다(출처: IMDb).
헬보이 시리즈가 마니아 사이에서 계속 소환되는 건 단순히 향수 때문이 아닙니다. 비주류 감성을 메이저 히어로물의 언어로 풀어낸 방식이 여전히 독보적이기 때문입니다.
헬보이를 아직 보지 않았다면, 2004년 델 토로 감독 버전부터 시작하시길 권합니다. 리부트판은 선택이지만, 원작 두 편은 거의 필수에 가깝습니다. 보고 나서 왜 론 펄먼의 헬보이가 아직도 회자되는지 자연스럽게 납득이 될 겁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크리처 영화로 봤다가, 두 번째 감상에서 완전히 다른 영화를 본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경험이 이 글을 쓰게 만든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