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서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옆 사람이 "재밌었어?"라고 물었는데, 딱히 '재밌다'는 말이 맞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무언가 묵직한 것이 가슴에 걸린 채로 지하철을 탔습니다. 그게 콘크리트 유토피아였습니다.
아파트 계급 — 황궁 주민이 된다는 것의 의미
영화의 배경이 되는 황궁 아파트는, 사실 고급 아파트가 아닙니다. 복도식 구조에 20평대 이하 소형 평형. 평소에는 맞은편 드림팰리스 주민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평범한 단지입니다. 그런데 대지진이 모든 걸 바꿔버립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개념이 NIMBY(Not In My Back Yard) 현상입니다. NIMBY란 내 이익에 해가 되는 시설이나 집단은 내 주변에 두지 않겠다는 집단 이기주의를 뜻합니다. 영화 속 황궁 주민들이 외부인을 철저히 배제하고 '주민 전용 공간'을 고수하는 장면들은, 이 NIMBY 심리가 극한의 생존 상황에서 어떻게 폭발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재난 이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황궁 아파트 주민증이, 재난 이후엔 생사를 가르는 신분증이 되어버리는 거죠.
제가 이 장면들을 보면서 특히 서늘했던 건, 주민들의 표정이었습니다. 외부인을 내쫓는 투표를 할 때 그 얼굴들이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습니다. 혐오나 분노가 아니라 그냥 '당연한 일'을 처리하는 표정. 그 평온함이 진짜 공포였습니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닙니다. 국토교통부 통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국 주택 중 아파트 비율은 약 64%에 달합니다(출처: 국토교통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수치입니다. 아파트 단지명과 평형이 곧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설명하는 나라. 영화는 그 구조가 붕괴된 이후에도 인간이 얼마나 빠르게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내는지를 차갑게 기록합니다.
집단 광기 — 민주주의가 괴물이 되는 순간
영화에서 제가 가장 충격적으로 봤던 장면은 외부인 추방 투표 장면이었습니다. 흰 돌은 찬성, 검은 돌은 반대. 형식은 완전히 민주적입니다. 그런데 그 민주적 절차가 결론으로 내놓는 것은 타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결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totalitarianism)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전체주의란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양심과 판단을 억압하고, 구성원 모두가 그 폭력에 공모하게 만드는 체제를 말합니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도, 스탈린의 소련도, 처음에는 '우리를 위한' 구호로 시작했습니다. 황궁 아파트의 '주민을 위한 규칙'이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맥락에서 역사적 사례 하나가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이어진 사라예보 포위 전(Siege of Sarajevo)입니다. 당시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는 세르비아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하면서 전기, 수도, 식량 공급이 전면 차단되었습니다. 이 포위 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도시 포위 전 중 가장 긴 기간(1,425일)을 기록한 사건입니다(출처: 유엔 전쟁범죄위원회).
그때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을 보면 소름이 돋습니다. 평소에는 다정하던 이웃, 교사, 의사, 회사원들이 불과 몇 주 만에 식량을 구하러 온 다른 건물 피란민들에게 총구를 겨누었다고 합니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만든 방범대가, 사라예보 아파트 주민들이 만든 자체 방어대와 그렇게 겹쳐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황궁 아파트에서 집단 광기가 임계점에 도달하는 양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민주적 투표라는 형식으로 비인도적 결정을 정당화
- 외부인을 '바퀴벌레'로 명명하며 인간성을 박탈하는 비인화(dehumanization) 과정
- 강한 지도자 영탁을 구심점으로 개인의 양심이 집단 규율에 종속
- 방범대 조직을 통해 폭력을 제도화하고, 구성원 모두를 공범으로 만드는 구조
비인화(dehumanization)란 특정 집단이나 개인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여 폭력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을 낮추는 과정입니다. 역사 속 집단 학살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영탁이 이끄는 황궁 주민들이 외부인을 지칭하는 방식이 바로 이 비인화의 교과서적 사례입니다.
사라예보 — 영화가 허구가 아닌 이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이건 좀 과장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사라예보 포위 전의 실화가 그 생각을 무너뜨렸습니다.
당시 사라예보 아파트 생존자들은 영하의 추위를 버티기 위해 마룻바닥을 직접 뜯어내고, 문짝과 가구를 땔감으로 태웠습니다. 단지 내 도서관 장서까지 불태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자원 배분의 문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투에 참여하거나 노동 기여를 할 수 없는 노약자들은 배급에서 체계적으로 소외되었습니다. 영화에서 황도 통조림 하나를 두고 주민과 외부인 사이에 형성되는 팽팽한 긴장감이, 현실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 영화가 일반적인 재난 영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재난 영화는 재난 그 자체를 스펙터클로 소비합니다. 건물이 무너지고, 불길이 치솟고, 영웅이 등장하는 구조. 그런데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 이후의 사람을 봅니다. 불이 다 꺼지고 나서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현실감 있는 아파트 복도와 계단실 안에서 조용히 들여다봅니다.
엄태화 감독이 인터뷰에서 "믿어질 법한 그림으로 연출하려 했다"라고 밝힌 것은 허언이 아닙니다. 영화가 몰입감을 주는 건 화려한 CG 때문이 아니라, 그 공간이 우리가 매일 살고 있는 바로 그 아파트이기 때문입니다. 엘리베이터, 공용 로비, 층간소음이 울리는 복도. 그 익숙한 공간이 배타성과 폭력의 무대가 되는 순간, 관객은 화면 속 주민들을 '저 사람들'이 아닌 '나'로 읽게 됩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불편한 영화인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영화 속 황궁 주민 중에 저도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명화(박보영 분)처럼 끝까지 인간성을 지킬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보고 끝나는 게 아니라, 보고 나서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재난 영화를 찾는다면 이 영화를 권합니다. 단, 보고 나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도 함께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