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MCU 페이즈 1 작품 중 가장 과소평가받는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화려한 액션보다는 스티브 로저스라는 인물의 서사에 집중하는 구성인데, 보면 볼수록 뒤에 숨겨진 디테일과 복선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글에서는 영화 안에 촘촘하게 박혀 있는 이스터에그들, 그리고 제가 영화를 보다 문득 떠올린 현실의 인물 이야기를 함께 풀어보려 합니다.
이스터에그와 복선으로 촘촘하게 짜인 영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그냥 흘려보냈던 장면들이, 두 번 세 번 보다 보면 전혀 다르게 읽히기 시작합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지나쳤는데, 알고 나서 다시 봤을 때 꽤나 감탄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방패에 대한 복선입니다. 왜소했던 시절의 스티브가 골목에서 불량배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쓰레기통 뚜껑을 들어 올리는 장면, 그리고 첫 미션에서 택시 문을 뜯어 방패로 사용하는 장면이 연속으로 등장합니다. 쓰레기통 뚜껑은 나중에 스티브가 쓰게 될 원형 방패의 형태를, 택시 문은 그 방패에 그려진 별 모양 로고를 각각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영화 전반에 걸쳐 복선(伏線), 즉 이후 전개될 내용을 미리 암시하는 장치들이 세밀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스터 에그(Easter Egg)도 상당히 풍성합니다. 여기서 이스터 에그란 영화나 게임 등의 콘텐츠에 제작진이 숨겨놓은 숨은 참조나 유머를 의미합니다. 레드 스컬이 테서랙트를 발견하며 내뱉는 대사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 1편을 직접 겨냥한 참조인데, 이게 가능했던 건 감독 조 존스턴이 과거 인디아나 존스 1편의 시각 효과 담당자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그 장면을 다시 봤을 때는 괜히 혼자 피식 웃었습니다.
스타크 엑스포에 전시된 유리관 속 마네킹도 그냥 배경 소품이 아닙니다. 이 마네킹은 마블 코믹스 역사상 최초의 휴먼 토치, 즉 짐 해먼드를 가리키는 이스터 에그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조니 스톰이 2대이고, 짐 해먼드가 1대라는 사실을 아는 분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또 하나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건 레드 스컬의 복선 처리 방식입니다. 원작 코믹스에서는 빨간 해골 얼굴이 가면이고 실제 얼굴은 평범한 인간인 반면, 영화판은 이를 뒤집어서 평범한 얼굴이 가면이고 해골이 진짜 얼굴입니다. 이 반전을 영화는 초반부터 조용히 암시합니다. 귀 근처에 가면 봉합 흔적이 있고, 레드 스컬이 불편한 듯 얼굴을 자꾸 만지작거리며,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가 붉은 물감만 쓰고 있습니다. 이런 레이어드 스토리텔링(Layered Storytelling), 즉 표면 아래에 여러 겹의 의미를 쌓아두는 서사 기법이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이스터 에그를 정리하면 핵심 포인트를 몇 가지로 추릴 수 있습니다.
- 쓰레기통 뚜껑과 택시 문: 원형 방패와 별 모양 로고의 사전 복선
- 스타크 엑스포의 유리관 마네킹: 마블 최초 휴먼 토치 짐 해먼드에 대한 오마주
- 레드 스컬의 가면 봉합 흔적: 영화판 설정 반전에 대한 복선
- 필립스 대령의 빨간 버튼: 토미 리 존스의 전작 맨 인 블랙 참조
- 텐스베르그 신전: 토르 1편 및 엔드게임까지 이어지는 MCU 지리 연속성
MCU의 세계관 구축 방식에 관심이 있다면, 마블 스튜디오가 공식적으로 설명하는 MCU 타임라인도 참고할 만합니다(출처: Marvel 공식 사이트).
현실판 캡틴 아메리카와 작품이 남긴 질문
영화를 보다가 문득 현실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막연히 떠올린 것인데, 찾아보니 정말로 스티브 로저스를 연상시키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오디 머피입니다.
오디 머피는 영화 속 스티브처럼 입대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165cm의 왜소한 체격에 영양실조 상태였던 그는 해병대와 해군에서 차례로 입대를 거절당했고, 결국 육군을 통해 겨우 전장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스티브가 다섯 번 지원서를 내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그 장면과 이상하리만치 겹쳐 보입니다.
그의 진가가 드러난 건 1945년 프랑스 홀츠비어 전투였습니다. 아군이 후퇴해야 하는 위기 상황에서 그는 동료들을 뒤로 물리고 홀로 전선에 남았습니다. 불타오르는 대전차 자주포 위에 올라가 기관총으로 밀려오는 독일군을 혼자 저지했고, 다리에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반격을 지휘해 결국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이 공로로 그는 미군 최고 무공 훈장인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포함해 총 33개의 무공 훈장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명예 훈장이란 미국 의회가 수여하는 최고 등급의 군사 훈장으로, 전투 중 생명을 무릅쓴 특별한 용기에 대해 수여됩니다.
재미있는 건 전쟁 후 그가 할리우드 배우로 데뷔해서 자신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지옥의 전선(To Hell and Back)에 직접 주연으로 출연했다는 점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진짜 소설보다 소설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오디 머피의 이야기를 두고 "시대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전쟁 영웅의 무용담이 때로 전쟁 자체를 미화하는 방향으로 소비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저도 그 지적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머피 본인도 전후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를 앓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PTSD란 심각한 외상적 사건을 경험한 이후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심리적 스트레스 반응을 말합니다. 미국 재향군인부(VA) 자료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의 상당수가 귀환 후 이와 유사한 증상을 겪었던 것으로 보고되어 있습니다(출처: 미국 재향군인부 VA).
영화로 돌아오면, 퍼스트 어벤져가 단순한 오리진 무비(Origin Movie), 즉 히어로가 탄생하는 배경을 보여주는 입문 영화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중요한 건 덩치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용기"라는 메시지를 스티브 혼자가 아니라 페기 카터도 함께 증명한다는 점이 특히 좋았습니다. 수류탄이 던져졌을 때 스티브와 거의 동시에 몸을 던지려 했던 페기의 모습은, 그녀가 왜 멀티버스에서 캡틴 카터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조용하면서도 강렬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비판적인 시각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레드 스컬이라는 매력적인 빌런이 등장했음에도 최후 대결이 다소 허무하게 마무리된다는 지적, 하울링 코만도스와의 전투가 몽타주로 빠르게 지나가면서 액션의 밀도가 부족하다는 점은 저도 공감합니다. 이런 면에서 퍼스트 어벤져는 단독 작품으로서의 완결성보다는 윈터 솔저와 엔드게임에서 폭발할 감정의 토대를 쌓는 역할을 한 영화라고 보는 게 적절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설정한 복선들이 결국 엔드게임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처음 봤을 때의 인상과 지금의 인상이 크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다시 보고 나서야 진짜 맛이 나는 영화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MCU를 아직 시작하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이 작품을 단순한 도입부로만 볼 게 아니라 숨겨진 레이어를 하나씩 찾아가며 보기를 권합니다. 한 번 보고 덮기에는 아까운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