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거든요.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달랐던 탓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니 그게 꼭 배신당한 느낌만은 아니었습니다. 《조커: 폴리 아 돼》는 전작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분명 불편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을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보면, 이 영화가 실은 매우 일관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아서 플렉은 처음부터 조커가 될 수 없었다
제가 직접 1편을 다시 돌려보면서 느낀 건, 아서 플렉이 가진 근본적인 성질이 조커와는 방향 자체가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우리가 코믹스나 다크 나이트에서 알던 조커는 타인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혼돈 자체가 목적이고, 남이 뭐라 하든 자기가 재미있으면 저질러 보는 캐릭터죠. 철학자 니체가 말한 능동적 초인, 이른바 위버멘쉬(Übermensch)에 자주 비견되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여기서 위버멘쉬란 기존의 가치 체계를 스스로 뛰어넘어 자기만의 의지로 세계를 창조하는 인간 유형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아서는 누군가 손뼉 쳐 줄 때 가장 신이 나는 사람입니다. 타인의 반응이 그의 감정 상태를 통째로 결정하는 구조죠.
1편을 보면 이 패턴이 반복됩니다. 이웃 소피가 말 한마디 걸어주자 금방 기분이 좋아져 망상에 빠지고, 지하철에서 조롱을 당하자 충동적으로 총을 꺼냅니다. 머레이도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없었는데, 계속 열받는 말을 하니 홧김에 방아쇠를 당기고 맙니다. 이건 능동적 파괴 의지가 아니라,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타인 의존적 반응성(reactive dependency)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해 자기 안에서 먼저 뭔가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감정과 행동이 결정되는 성향을 뜻합니다.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이 아무리 트라우마적 사건을 겪는다 해도, 타인을 도구로 보며 혼자서 혼돈을 창조해 나가는 진짜 조커로 각성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2편에서도 이 본성은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캄 수용소에서 유명 재소자로 대우받게 되자 기고만장해지고, 리 퀸젤이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자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즉각 반응하며 조커 쇼를 이어갑니다. 반대로 법정에서 자신의 과거를 비하하는 발언이 나오면 곧바로 발끈합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변할 수 없는 구조가 처음부터 그 안에 있었던 겁니다.
이 영화에서 평단이 주목한 또 하나의 요소는 뮤지컬 시퀀스의 활용 방식입니다. 일반적인 뮤지컬 영화에서 노래와 춤은 감정의 고양을 표현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아서의 내면적 망상과 충족되지 못한 갈망을 시각화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미장센(mise-en-scène), 즉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의 총합이라는 개념으로 보면, 뮤지컬 장면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마다 등장해 아서의 심리 상태를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덕분에 대사 없이도 그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관객이 감각적으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감응성 정신병(폴리 아 돼)이 실제로 만드는 비극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건 사실 아서보다 리 퀸젤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서에게 사랑을 줬는데, 그 사랑이 결국 아서를 조커로 만든 게 아니라 조커를 끝내게 만들었거든요. 이 아이러니가 너무 서늘했습니다.
폴리 아 돼(Folie à Deux)는 프랑스 정신의학 용어로, 두 사람 이상이 동일한 망상이나 정신 증상을 공유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정식 명칭은 감응성 정신병으로, 밀접한 정서적 유대 관계에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한 사람의 망상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는 방식으로 발현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 증상이 사라지려면 두 사람을 물리적으로 격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1970년대 프랑스에서 기록된 사례 중, 한 청년의 피해망상이 연인에게 감응되어 두 사람이 동반 자살을 시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구조 후 두 사람을 격리하자 연인의 증상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그녀의 망상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유대감이 만들어낸 공명이었던 겁니다.
정신의학에서 이 현상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개념이 감응 기제(induction mechanism)입니다. 감응 기제란 강한 정서적 결속 관계에서 한 사람의 심리적 상태가 상대방에게 무의식적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폴리 아 돼 가 무서운 이유는 전파된 쪽이 자신의 믿음이 외부에서 온 것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출처: 미국 정신의학회).
리 퀸젤도 본질적으로 타인 의존적인 성격입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그녀 역시 스스로 무언가를 주도할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는 거였습니다. 자기 대신 세상에 맞서줄 누군가를 간절히 원했고, 조커가 그 자리에 딱 들어맞은 것이죠. 아서가 사랑받으면 사랑으로 가득 차는 어릿광대라면, 리 퀸젤은 강한 존재의 그림자 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두 사람 모두 조커라는 환상을 만들어낼 자질이 없었고, 그 환상을 공유함으로써 서로를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임상 심리학에서 흥미로운 연구들이 축적되어 있는데, 망상 장애를 가진 환자와 가까이 지낸 보호자의 약 25%에서 유사한 믿음 체계가 형성된다는 보고도 있습니다(출처: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 사랑이 때로는 가장 강력한 전파 경로가 된다는 것이 임상적으로도 확인된 사실인 셈입니다.
이 영화에서 관객이 불편함을 느끼는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전작에서 기대했던 조커의 각성이 끝내 일어나지 않는다
- 뮤지컬 장면이 카타르시스가 아닌 허망함으로 귀결된다
- 아서의 죽음이 영웅적 서사 없이 지극히 초라하게 처리된다
- 리 퀸젤의 사랑이 결국 이기적 집착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저는 아서의 마지막 선언, "나는 조커가 아니다"를 그의 생애에서 가장 능동적인 순간으로 읽었습니다. 박수받으면 춤추고, 열받으면 화내던 사람이,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조커를 내려놓는 선택을 한 것이니까요. 비록 그 선택이 리 퀸젤의 이탈을 불러왔고, 죽음으로 이어졌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서 플렉이라는 인간이 온전히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가 조커 신드롬의 속편으로서 실패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로서는, 1편과 정확히 맞물려 완결되는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다시 볼 기회가 생긴다면, 조커를 기대하는 눈 대신 아서 플렉의 사랑 이야기를 따라가 보시길 권합니다. 뮤지컬 장면들이 조금 다른 온도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