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개봉 당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오른 SF 영화는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뤽 베송의 제5원소가 바로 그 드문 사례 중 하나입니다. 처음 이 사실을 접했을 때 저는 솔직히 좀 의외였습니다.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이 영화가 칸의 레드카펫을 밟았다는 게 쉽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직접 몇 번 반복해서 보고 나서야 이 영화가 가진 진짜 층위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스펙터클 뒤에 숨겨진 미장센의 설계
제5원소를 처음 보는 사람이 가장 먼저 압도당하는 건 비주얼입니다. 23세기 뉴욕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수직으로 쌓인 도시 구조, 하늘을 가득 채운 비행 택시, 원색으로 뒤덮인 의상까지 당시 관객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을 펼쳐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미장센(mise-en-scène)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담기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 조명, 세트 디자인, 의상, 색채까지를 연출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뤽 베송은 이 영화에서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라는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를 의상 담당으로 기용했는데, 그 결과물이 지금 봐도 놀랍습니다. 특히 디바 플라바라구나의 공연 장면은 흰 붕대 같은 의상과 파란 피부, 오페라와 팝을 넘나드는 음악이 결합된 장면으로 영화사에서 시청각적 완성도 측면에서 자주 인용됩니다. 제가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는 말 그대로 멍하니 화면만 바라봤습니다.
이 영화의 색채 연출을 좀 더 들여다보면, 뤽 베송은 주인공 리루(Leeloo)를 표현할 때 주황색 계열을 일관되게 사용합니다. 이는 색채 심리학에서 생명력과 에너지를 상징하는 색으로, 의도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반면 악의 존재인 검은 구체(the Great Evil)는 철저하게 무채색으로 표현됩니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색 대비가 실은 정교하게 설계된 시각적 서사 구조입니다.
제가 직접 비교해 봤는데, 같은 해 개봉한 다른 SF 블록버스터들과 나란히 두면 제5원소의 색감은 유독 튀고 대담합니다. 당시 SF 장르의 주류였던 디스토피아 미학, 즉 어둡고 무거운 세계관 대신 뤽 베송은 의도적으로 과잉된 색깔의 낙관주의를 선택했습니다. 이 결정이 호불호를 갈랐지만, 동시에 27년이 지난 지금도 이 영화를 기억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5원소의 시각적 성과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장 폴 고티에의 의상 디자인: 약 1,000벌 이상의 의상이 제작되었으며, 패션쇼 수준의 완성도를 갖춤
- 색채 심리학 기반 캐릭터 구분: 리루(주황), 악의 구체(무채색), 성직자 코넬리우스(보라·갈색 계열)로 의도적 대비
- 세트 디자인: 프랑스 스튜디오에서 실물 세트를 직접 제작, 당시 유럽 최대 규모의 세트 작업으로 기록됨(출처: BFI(영국영화협회))
리루가 멈춘 이유, 그리고 영화가 말하려 했던 것
솔직히 처음 봤을 때는 이 영화의 결말이 다소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세상을 구하는 무기가 결국 '사랑 고백'이라는 설정이 너무 순진하게 다가왔거든요. 그런데 리루가 컴퓨터로 인류의 역사를 검색하는 장면을 다시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리루가 접한 것은 카타르시스(catharsis)가 없는 역사였습니다. 카타르시스란 본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개념으로, 비극을 통해 감정이 정화되는 과정을 뜻합니다. 그런데 리루가 본 전쟁과 학살의 기록에는 그 정화가 없었습니다. 반복되는 파괴, 끝나지 않는 폭력. 완벽한 유기체로 설계된 존재가 그 앞에서 무너진 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여기서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분명해집니다. 무기와 기술로는 절대 악을 이길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완벽하게 설계된 존재조차 의지를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코벤(코르 벤 달라스)이 리루에게 한 사랑 고백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한 인간이 다른 존재에게 "나는 네가 필요하다"라고 말한 것뿐이었죠. 그게 리루를 다시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영화 내러티브 구조 측면에서 보면, 제5원소는 맥거핀(MacGuffin)을 전면에 배치한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맥거핀이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장치로 겉으로는 중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무언가를 위한 도구에 불과한 요소를 말합니다. 이 영화에서 사 원소 돌들이 바로 맥거핀입니다. 영화 내내 그 돌들을 찾아 헤매지만, 진짜 열쇠는 제5원소, 즉 사랑이라는 감정에 있었으니까요. 이 구조를 의도한 것인지 뤽 베송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꽤 잘 작동합니다.
물론 비판점도 있습니다. 리루가 결국 남성 주인공의 사랑을 통해 완성된다는 서사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불편하게 읽힐 수 있습니다. 이런 서사 구조를 페미니즘 영화 비평에서는 '남성 구원자 서사(male savior narrative)'라고 분류합니다. 남성 구원자 서사란 여성 캐릭터가 스스로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개입 없이는 완전해지지 못하는 구조를 말합니다. 이 점은 제5원소가 아무리 독창적이더라도 시대적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게 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화려한 스펙터클 안에 꽤 진지한 질문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장르 관습에 대한 연구에서도 제5원소는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 장르의 탈장르적 실험으로 자주 분석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란 우주를 배경으로 영웅 서사와 극적 감정선을 결합한 SF 하위 장르를 의미합니다. 스타워즈가 정석이라면, 제5원소는 그 문법을 파괴한 사례로 거론됩니다(출처: 미국영화연구소(AFI)).
27년이 지났는데도 이 영화가 계속 회자되는 건 그냥 비주얼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세상을 구하는 게 무기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라는, 어쩌면 너무 단순한 명제를 이렇게까지 요란하고 화려하게 포장해서 전달하는 영화는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많지 않습니다. 제5원소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지금 당장 보시는 걸 권합니다. 분석이고 뭐고 일단 디바 플라바라구나의 공연 장면을 먼저 보시면 나머지 설명은 필요 없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