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장에서 봉오동 전투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끝까지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숨 가쁜 전투가 이어지는데, 어느 순간부터 화면을 보면서도 머릿속이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냥 제가 영화를 잘 못 본 건지 싶어서 한 번 더 봤습니다. 근데 두 번째도 같은 지점에서 똑같이 몰입이 깨졌습니다. 그때부터 이 영화를 좀 더 꼼꼼하게 뜯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액션연출, 역동성과 산만함 사이
봉오동 전투의 전투 씬은 분명 공들인 티가 납니다. 드론 촬영과 스테디캠, 그리고 배우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찍은 핸드헬드 기법이 뒤섞이면서 산악 지형을 달리는 장면들이 꽤 생동감 있게 담겼습니다. 여기서 핸드헬드 기법이란 카메라를 삼각대 없이 손으로 들고 촬영하는 방식으로, 흔들리는 화면이 현장에 있는 듯한 현실감을 만들어 냅니다. 산꼭대기를 내달리고 돌밭 비탈을 구르듯 내려오는 장면들은 이 기법 덕분에 더 날것의 긴장감을 전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편집입니다. 전투가 달아오를수록 컷(cut)이 지나치게 잘게 쪼개져서 공간감이 사라집니다. 컷이란 화면과 화면 사이의 전환 단위를 말하는데, 컷이 너무 빠르게 전환되면 두 집단이 서로 어느 위치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감이 오질 않습니다. 제가 실제로 보면서 가장 답답했던 부분이 바로 이 공간 구성이었습니다. 독립군과 일본군이 서로를 향해 총을 쏘는 건지, 아니면 그냥 각자 허공에 대고 쏘는 건지 헷갈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해철의 검 액션은 더 아쉽습니다. 롱테이크, 즉 편집 없이 길게 이어지는 촬영으로 인물의 동작과 감정을 충분히 보여줬더라면 훨씬 강렬했을 텐데, 지나치게 세분화된 컷 편집 때문에 "액션을 하는 척"으로만 보이는 순간들이 생겼습니다. 아쉬운 지점입니다.
역사고증, 얼마나 진지하게 접근했나
영화는 독립신문 등 당시 기록을 참고해 제작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역사 고증이란 역사적 사건을 재현할 때 실제 기록과 유물, 문헌에 근거해 사실성을 확보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봉오동 전투는 나름의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보입니다. 당시 독립군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인 평범한 민초들이었다는 점을 각 인물들의 서로 다른 사투리로 표현한 것은 꽤 세심한 접근이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1920년 청산리 대첩의 어랑촌 전투 기록을 자연스럽게 떠올렸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가 며칠째 굶고 지친 상태로 일본 정규군을 맞서던 그 순간, 홍범도 장군 부대가 측면에서 기습 합류하면서 전세를 뒤집은 실제 전투입니다. 영화보다 더 극적인 이 역사가 실재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봉오동 전투도 그 역사적 무게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소재였습니다.
봉오동 전투의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대규모 승전
- 독립군이 일본군을 산악 지형으로 유인해 포위 섬멸하는 전술을 성공적으로 구사한 사례
- 이 승리가 청산리 대첩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후 독립군 활동의 상징적 분기점으로 평가됨
국가보훈부는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독립운동사의 핵심 승전으로 공식 기록하고 있으며, 매년 관련 기념행사를 통해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습니다(출처: 국가보훈부).
반일프레임,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과 실제 전달된 것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길게 생각하게 된 부분은 바로 일본군의 묘사 방식입니다. 잔혹한 장면들, 피가 튀고 목이 잘리는 연출들은 영화적 장치로 이해는 됩니다. 영화 초반 등장하는 호랑이 장면도 한반도를 상징하는 메타포(metaphor), 즉 직접적 표현 대신 다른 대상을 빌려 의미를 전달하는 비유적 표현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철창에 갇히고 난도질당하는 호랑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처지를 시각화한 것이죠.
그런데 감독이 인터뷰에서 직접 밝혔듯이, 이 영화가 목표로 삼은 건 "저항과 승리의 역사"입니다. 역사 교과서에서 일제의 지배 정책은 10페이지가 넘는데 저항의 역사는 두 페이지밖에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방향은 명확해야 합니다. 적의 잔혹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워서 이긴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죠.
제 경험상 이런 균형이 무너지면 관객은 두 가지 감정 중 하나만 남게 됩니다. 분노, 혹은 카타르시스. 둘 다 유효한 감정이지만, 역사를 깊이 이해하는 데는 부족합니다. 뮤지컬 영웅이 안중근 의사의 업적보다 인간 안중근의 고뇌에 집중하면서 비교적 중립적인 시선을 유지한 것과 대비되는 지점이 여기 있습니다. 상대가 나쁘다는 것보다, 우리가 어떻게 맞섰는가가 더 중요한 이야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KOFIC)에 따르면 봉오동 전투는 2019년 개봉 당시 누적 관객 수 약 478만 명을 기록하며 그해 여름 극장가를 이끈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이 수치는 역사 소재 영화가 대중적 공감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만큼 영화가 전달하는 역사 인식의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도 함께 말해 줍니다.
캐릭터 서사, 생략이 남긴 아쉬움
영화를 두 번 보고 나서야 제가 놓쳤던 구조가 보였습니다. 장하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누이의 환영을 보는 장면, 그리고 그 직후 해철이 등장하는 장면은 영화 전체의 감정적 정점이 될 수 있는 설계였습니다. 장하에게 누이 같은 존재가 된 해철, 해철에게는 잃어버린 동생의 자리를 채워준 장하. 이 관계가 전투의 클라이맥스와 맞닿는 순간은 분명히 감동적인 설계입니다.
그런데 이 맥락이 영화 속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전투 장면 분량을 확보하면서 인물 간 감정선에 할애할 시간이 줄었고, 그 결과 클라이맥스 직전에 흐름이 뚝 끊기는 느낌이 생겨 버렸습니다. 제가 두 번 보고도 같은 지점에서 몰입이 깨진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내러티브(narrative), 즉 사건들이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구조가 약해지면 아무리 화면이 화려해도 감정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유키오라는 일본군 캐릭터의 존재, 춘희와 개똥이의 서사, 끝까지 살아남는 일본 장교 등 감독이 영화에 심어 놓은 장치들은 하나하나 의도가 있습니다. 일본 스스로가 자신들의 행동을 돌아봐야 한다는 메시지, 이름 없이 싸운 민초들에 대한 헌사, 전쟁의 폭력성에 대한 고발. 이 모든 것을 한 편의 상업 영화 안에 담으려다 보니, 가장 중요하게 전달해야 할 메시지가 오히려 희석된 느낌이 듭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수록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묻히는 아이러니가 이 영화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봉오동 전투는 잘 만든 오락영화와 묵직한 역사 해석 사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두 목표를 동시에 쫓다 보니 어느 쪽에서도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1920년 그 여름 산속에서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극장으로 불러온 것만은 분명한 의미가 있습니다. 역사 영화를 고를 때 단순히 스펙터클을 기대하기보다, 감독이 어떤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보는지를 함께 읽어보는 것이 더 풍부한 관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