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파를 처단하는 영화가 통쾌하게 느껴진다면, 우리는 아직 그 역사를 제대로 정산하지 못한 걸까요? 영화를 보고 나서 저는 한동안 이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단순히 재미있었다는 감상 이상의 무언가가 남아서, 뭔가 찜찜하고 동시에 뭉클한 이 이상한 감정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알츠하이머와 복수 서사, 이 조합이 왜 유독 강렬한가
영화의 핵심 설정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주인공 필주는 뇌종양 말기와 알츠하이머를 동시에 앓고 있는 80대 노인입니다. 알츠하이머(Alzheimer's Disease)란 뇌의 신경세포가 점차 파괴되어 기억력, 언어 능력, 판단력이 서서히 소실되는 퇴행성 뇌 질환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바로 이 설정을 역설적으로 활용합니다. 모든 기억이 지워져 가는 사람이, 오직 하나의 기억만큼은 죽기 전에 완수하려 한다는 서사 구조가 관객에게 특별한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실제로 저는 영화를 보다가 필주가 손가락에 새긴 문신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단순한 액션 영화의 설정이 아니라, 기억을 잃어가는 몸으로 기억을 지키려는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치매를 앓는 가족을 곁에서 지켜본 분들이라면 이 장면이 더욱 다르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이 영화가 다루는 역사적 배경, 즉 일제강점기의 강제 징용과 민족 반역 행위는 단순히 영화적 소재가 아닙니다. 일제강점기(1910~1945) 당시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약 78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출처: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이 숫자 앞에서 영화의 복수 서사는 허구가 아니라 현실의 무게를 지게 됩니다.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요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알츠하이머 설정을 복수의 시급성과 연결시킨 독창적인 서사 구조
- 손가락 문신이라는 시각적 장치로 기억과 의지를 동시에 표현한 연출
- 청년 인규와의 세대 간 동행을 통해 역사의 비극을 현재와 잇는 방식
- 관동군 권총이라는 소품을 단서로 활용해 역사적 맥락을 자연스럽게 삽입한 구성
캐릭터 서사 측면에서 영화는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적극적으로 노립니다. 카타르시스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개념으로, 억눌린 감정이 예술적 경험을 통해 해소되는 심리적 정화 작용을 의미합니다. 갑질하는 손님에게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복수의 첫 단계로 이어지는 흐름은, 관객의 응어리진 감정을 영화적으로 대리 해소시키는 방식으로 꽤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는 관객이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하는 속도를 눈에 띄게 높입니다.
장르적 쾌감 뒤에 남는 아쉬움, 어디까지가 정당한 비판인가
솔직히 말하면, 영화관을 나오면서 저는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하나는 "시원하다"는 감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게 전부인가"라는 의문이었습니다.
영화가 빠른 전개와 유머 코드로 관객을 붙잡는 데는 분명히 성공합니다. 하지만 저는 복수 대상인 친일파 캐릭터들이 너무 납작하게 그려진다는 점이 계속 걸렸습니다.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한 게 드러나고, 그 대가를 치른다는 구조는 명쾌하지만, 영화가 주제의 무게만큼 서사를 깊이 파고들지는 않습니다. 이 부분은 단순히 취향의 차이라기보다,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상업 영화가 복잡한 역사적 서사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시각이 있고, 그 자체로 틀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삼는 이상 그 배경이 단순한 배경 장치로 소비되지 않을 책임은 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가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증언 자료를 접했을 때, 영화 속 묘사보다 훨씬 복잡하고 비루하고 긴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영화 서사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 중 하나가 내러티브 클로저(narrative closure)입니다. 이는 이야기의 모든 갈등과 긴장이 결말에서 깔끔하게 해소되는 서사 구조를 뜻합니다. 영화는 이 내러티브 클로저에 상당히 충실한 편인데, 그것이 오히려 역사적 상처라는 소재와 충돌을 일으킵니다. 현실의 역사는 깔끔하게 닫히지 않으니까요.
한국 영화 진흥위원회(KOFIC) 통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를 다룬 한국 영화의 관객 만족도는 평균보다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이 데이터는 이 소재가 여전히 한국 관객의 감정적 공명을 건드린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공명을 어떤 방향으로 이끄느냐가 결국 감독의 선택이고, 거기서 관객의 해석이 갈리는 지점이 생깁니다.
~라는 의견도 있지만, 제 경험상 이 영화는 분명 잘 만들어진 대중 영화입니다. 다만 그 틀 안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이성민 배우의 연기만큼은 영화의 어떤 허점도 덮어버릴 정도로 압도적이었는데, 역으로 말하면 그 연기에 기대는 부분이 너무 크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실 계획이라면, 역사 다큐멘터리나 증언 자료를 한 편 먼저 접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영화가 던지는 "기억하라"는 메시지가 단순한 극적 장치가 아니라 현실의 요청이라는 걸 느끼면, 같은 장면도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저는 그게 이 영화를 가장 잘 보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https://youtu.be/f6 fQiV0 Un6 g? si=D2 Ix9 Ke7 MEy2 q0 V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