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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가 없다 (해고 트라우마, 자본주의 비판, 이병헌)

by orangegold8 2026. 5. 21.

영화 어쩔수가없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그냥 박찬욱 감독의 스타일리시한 스릴러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근데 극장을 나오면서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고, 그게 한참이나 가시질 않았습니다. 단순히 재밌는 영화가 아니었던 겁니다. 실직, 구직, 자존심, 가족.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요.

해고는 왜 이렇게 사람을 부수는가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유만수라는 인물이 바비큐를 구우며 "이제 다 이루었다"라고 느끼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저도 그 장면을 보면서 '저게 평범한 중년 남자가 원하는 전부겠구나' 싶었습니다. 좋은 집, 아내와 아이들, 반려견, 20년 넘게 쌓은 커리어. 그런데 구조조정(Restructuring), 즉 기업이 비용 절감을 위해 인력을 대규모로 감축하는 조치 하나가 이 모든 걸 무너뜨립니다.

제지업계에서 20년 이상 일해온 만수는 미국계 사모펀드(Private Equity Fund)에 회사가 인수되면서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습니다. 사모펀드란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기업을 인수한 뒤 구조조정 등을 통해 단기간에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금융 투자 주체를 뜻합니다. 경력이 길수록 연봉이 높고, 연봉이 높을수록 도끼가 먼저 날아오는 구조. 영화는 이 잔인한 메커니즘을 미국 본사 임원이 "우리는 이걸 Axe(도끼질)라고 부릅니다"라고 말하는 장면 하나로 압축합니다.

제가 직접 비슷한 상황을 옆에서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IMF 여파가 채 가시지 않던 시절, 가까운 어른이 대기업 엔지니어로 일하다 구조조정에 잘려나갔습니다. 40대 중반이었고, 아이들은 한창 학원비가 들어갈 나이였죠. 그분은 몇 달 동안 양복을 입고 집을 나섰지만 갈 곳이 없었습니다. 공원 벤치에 앉아 하루를 보내다 저녁에 돌아오는 생활이었습니다. 결국 새벽 인력시장과 밤 대리운전으로 버텨냈지만, 그 표정은 지금도 잊히질 않습니다. 만수가 겪는 것이 영화 속 과장이 아니라는 걸,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고용 불안은 정신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칩니다. 실직 상태가 지속될수록 우울감과 자존감 저하가 급격히 심화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출처: 한국고용정보원). 만수가 거절만 돌아오는 구직 활동 끝에 결국 폭력의 길을 선택하는 과정은, 그래서 황당하면서도 어딘가 이해가 됩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자본주의 비판의 층위들

어쩔 수가 없다는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1997년 소설 더 엑셀을 원작으로, 박찬욱 감독이 이경미 작가와 함께 현대적 맥락에 맞게 각색한 작품입니다.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9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은 뒤 국내 개봉까지 이어진 이 작품의 핵심 키워드는 하나입니다. 바로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 얼마나 위선적으로 쓰이는가입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란 카메라 앞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배우의 동선, 공간 구성, 색감 등을 총체적으로 설계하는 영화적 개념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미장센을 통해 공간 자체를 이야기로 만드는 감독입니다. 만수의 저택은 중년 남자의 로망이자 억눌림의 상징이고, 경쟁자들의 공간은 몰락의 정도를 눈으로 읽게 해 줍니다. 건축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영화 전반에 배어 있다는 평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닙니다.

영화 속 "어쩔 수가 없다"는 세 방향에서 반복됩니다.

  • 미국 본사는 해고를 통보하며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 만수는 경쟁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하면서 어쩔 수 없다고 되뇝니다.
  • 새 고용주는 AI 자동화 시스템 도입을 정당화하면서 같은 말을 합니다.

제 경험상 이 구조가 가장 무섭습니다. 아무도 악당이 아닌데 결과는 파멸이라는 것. 구조조정을 단행한 사모펀드도,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는 만수도, 결국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사실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냉소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책임 회피의 가장 세련된 포장지입니다.

블랙코미디(Black Comedy)란 죽음, 폭력, 실패 같은 비극적 소재를 유머로 비틀어 표현하는 장르를 말합니다. 만수가 허위 구인 광고를 내서 경쟁자들의 이력서를 받아보고, 자신의 등급을 스스로 확인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블랙코미디적 정수입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실소를 흘렸는데, 그게 부끄러웠습니다. 왜냐하면 그 발상이 전혀 낯설지 않았거든요. 저도 '나는 지금 시장에서 어느 등급쯤 될까' 한 번쯤 생각해 본 사람이니까요.

한편으로는 영화가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한 남자의 광기 어린 사투로만 풀어낸다는 비판도 이해합니다. 만수는 집을 팔 수도 있었고, 아내의 커리어를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업종을 바꿀 수도 있었죠. 그러나 그 선택들이 자신이 쌓아온 삶의 형태를 무너뜨린다고 여겼기 때문에 결국 폭력을 선택합니다. 그 선택의 근원이 사회 구조인지 개인의 집착인지, 영화는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습니다. 저는 그게 오히려 더 정직하다고 봤습니다.

이병헌과 손예진이 만들어낸 것들

이 영화의 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허물 수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거든요.

만수는 카리스마 있어 보이지만 압박만 닥치면 가치 없이 무너집니다. 이병헌은 이 모순을 화면 안에서 오가며, 그 행위는 전혀 공감할 수 없지만 동기는 이해 가능한 선을 끝까지 유지합니다. 최선출과 술을 마시는 장면은 제 경험상 올해 본 한국 영화 연기 중 가장 리얼했습니다. 대사도 없이 얼굴 하나로 "이 사람이 지금 무너지고 있다"는 걸 전달하는 그 장면은, 극장에서 소리 없이 보다가 숨을 참았습니다.

손예진이 연기한 아내 미리는 이 영화의 정서적 중심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알고, 닥친 상황을 현실적으로 파악하며, 남편을 들었다 놨다 하는 쫀쫀한 존재감. "당신도 새 출발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따뜻하기보다 서늘하게 느껴지는 건, 그 말이 진심이면서도 동시에 압박이기 때문입니다.

2024년 기준 한국의 중장년층 실직자 중 1년 이상 장기 실업 상태에 놓인 비율은 전체 실업자의 약 20%에 달합니다(출처: 통계청). 만수가 처한 상황은 통계 속 숫자이기도 합니다. 영화가 이 숫자를 한 가족의 이야기로 얼굴을 달아줬다는 점에서, 어쩔 수가 없다는 사회적 기록에 가까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박희순, 이성민, 차승원이 연기하는 조연들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몰락해 있는 '종이밥 인생'들입니다. 이들이 만수와 같은 업계 출신이면서도 각자 다른 방식으로 추락해 있다는 설정이 영화의 비극성을 훨씬 두텁게 만듭니다.

어쩔 수가 없다를 보고 나서 저는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나라면 어디서 멈췄을까. 영화는 그 질문을 관객 각자에게 던지고 극장 문을 닫아버립니다. 직장인이라면, 혹은 한 번이라도 직장을 잃어본 경험이 있다면 반드시 극장에서 보시길 권합니다. 차 안에서 혼자 생각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질 테니, 주차 위치는 미리 잘 잡아두시길 바랍니다.


참고: https://youtu.be/77 Yes279 dV8? si=Gj8 Wg9 gNTFrXG85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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