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관에서 팝콘을 집어 들다가 문득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이 장르, 나는 왜 이렇게 계속 보게 될까?" 복수극, 비밀 요원, 핵 테러. 설정만 들으면 뻔한데 손이 가는 장르가 분명 있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라 <어쌔신: 더 비기닝>을 보고 나서 한동안 생각이 꽤 길어졌습니다. 단순한 액션 영화라기엔 이 영화가 건드리는 지점이 제법 많았기 때문입니다.
복수 서사가 관객을 움직이는 이유
영화는 한 커플의 달콤한 순간으로 시작합니다. 프러포즈를 준비하던 미치 랩은 무차별 총기 난사 테러로 약혼녀 야콘을 눈앞에서 잃습니다. 이후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그는 혼자 훈련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복수의 칼날을 갑니다. 저는 이 도입부에서 의외로 꽤 오래 멈춰 있었습니다. 감정을 조작하려는 공식이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설정 자체가 가진 무게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영화의 서사 구조를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학에서는 이런 구조를 '리벤지 내러티브(Revenge Narrative)'라고 부릅니다. 리벤지 내러티브란 주인공이 개인적인 상실을 계기로 기존 사회 질서 밖으로 이탈해 폭력적 수단으로 정의를 추구하는 서사 구조를 의미합니다. 할리우드는 오랫동안 이 공식을 반복해 왔고, <어쌔신: 더 비기닝>도 그 계보에 충실하게 안착해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마치가 CIA에 스카우트되는 과정입니다. CIA 부국장 아이린은 6개월간 그를 추적 관찰한 뒤 요원으로 앉히기로 결심합니다. 이 장면이 제게는 단순한 설정 전환이 아니라, 국가 기관이 개인의 분노를 '자원화'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읽혔습니다. 실제로 CIA의 비밀 요원 선발 기준 중 하나는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의 판단력과 생존 본능입니다(출처: CIA 공식 홈페이지), 미치는 그 기준을 충족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요소는 마치를 훈련시키는 헐리라는 인물입니다. 헐리는 소위 '블랙 옵스(Black Ops)' 경험자로 묘사되는데, 블랙 옵스란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비밀 작전을 의미합니다. 현실에서도 이런 작전은 존재해 왔으며,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 이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Mossad)가 수행한 '신의 분노(Wrath of God)' 작전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제가 이 영화보다 그 실제 역사를 먼저 알고 봤기에, 헐리와 미치의 관계가 단순한 스승과 제자 구도 이상으로 느껴졌습니다.
마치가 훈련을 통해 자신의 비범한 신체 능력을 자각하는 과정도 주목할 지점입니다. 영화는 이를 타고난 재능처럼 포장하지만, 실제 특수부대 훈련 체계에서는 이를 '신체 적응 역치(Physical Adaptation Threshold)'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반복된 고강도 훈련이 신체의 한계치를 점진적으로 끌어올리는 현상으로, 인간 누구에게나 잠재된 가능성입니다. 영화적 과장이 있더라도, 그 바탕에 있는 생리학적 원리는 실제입니다.
요원 훈련과 팝콘 무비 사이 어딘가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마이클 키튼이 연기하는 헐리가 이렇게까지 극을 압도할 줄 몰랐습니다. 딜런 오브라이언의 마치가 날카롭고 충동적인 날 것의 에너지를 가진 인물이라면, 헐리는 수십 년간 현장을 누빈 노장의 냉정함을 가진 인물입니다. 둘의 충돌이 이 영화의 진짜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영화가 나아갈수록 몇 가지 아쉬움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스탄불 작전 시퀀스는 흥미로웠지만, 악역 '로니'의 캐릭터 구축이 아쉬웠습니다. 로니는 오리온 출신의 최고 요원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그의 배신 동기가 충분히 납득되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그는 플루토늄(Plutonium)을 이용한 핵무기 제조를 위협 수단으로 삼는데, 플루토늄이란 핵분열 반응에 사용되는 방사성 원소로 극소량만으로도 대규모 피해를 유발할 수 있는 물질입니다. 이 소재의 무게감은 충분했지만, 로니라는 인물이 그 무게를 받쳐주기엔 서사적 뒷받침이 부족했습니다.
이 영화의 핵심 비판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리벤지 내러티브 구조가 기존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신선함이 부족합니다.
- 악역 '로니'의 심리적 동기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 대결 구도의 무게감이 약합니다.
- 미국 중심의 안보 세계관이 전면에 드러나 현대 관객에게 다소 일방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 반면 헐리와 미치의 세대 갈등, 타격감 있는 근접 격투 연출은 명확한 강점입니다.
결말부의 함대 폭발 시퀀스는 시각적으로는 압도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개연성보다 스펙터클을 선택한 느낌이 강했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감탄보다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게 이 영화가 첩보 장르의 진짜 쾌감, 즉 치밀한 두뇌 싸움에서 한 발 물러선 지점이라고 봅니다.
한편, 영화 속 오리온(Orion) 같은 비밀 요원 조직의 심리적 부작용에 대한 연구도 존재합니다. 미국 재향군인부(VA) 자료에 따르면, 고강도 임무를 수행한 특수전 요원의 상당수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증상을 보인다고 보고되어 있습니다(출처: 미국 재향군인부). PTSD란 극심한 충격적 사건을 겪은 후 지속적으로 그 기억이 되살아나거나 감정이 마비되는 증상으로, 영화가 화려하게 그려내는 '살인 병기' 이면에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적 대가입니다. 미치 랩이 그 대가를 치르는 이야기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그게 이후 시리즈로 이어진다면 더 깊이 있는 작품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쌔신: 더 비기닝>은 제가 직접 봐보니 기대 이하도, 기대 이상도 아닌 영화였습니다. 빈스 플린의 원작 소설이 가진 심리적 밀도를 온전히 살려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마이클 키튼 한 명이 만들어내는 무게감만으로도 한 번쯤 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첩보물 장르에 처음 발을 들이는 분이라면 가볍게 즐기기 좋고, 원작 팬이라면 각색의 아쉬움이 남을 수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이라면 원작 소설도 함께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영화보다 미치 랩이라는 인물이 훨씬 입체적으로 살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