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팀 프로젝트 공지가 뜨는 순간, 누구나 한 번쯤 "제발 쓸 만한 사람들이랑 걸리게 해 주세요"라고 속으로 빌어본 적 있지 않으신가요. 저도 대학 시절 무작위 배정 조에서 처참한 라인업을 받아 들고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마블의 썬더볼츠를 보면서 그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결함투성이 캐릭터들이 모인 이유
썬더볼츠의 핵심은 히어로가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엘레나 벨로바는 언니를 잃은 뒤 공허함을 채우지 못한 채 CIA 국장 발렌티나의 지시를 기계적으로 수행하며 살아왔고, 존 워커는 캡틴 아메리카로 활동하다 불명예 제대한 후 가정마저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양자 실험 사고로 물질 통과 능력을 얻은 에이바는 실드(S.H.I.E.L.D.)에 의해 암살 요원으로 훈련받았다가 버려진 신세였죠.
여기서 실드(S.H.I.E.L.D.)란 Strategic Homeland Intervention, Enforcement and Logistics Division의 약자로, MCU에서 초인적 위협에 대응하는 정보기관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마블 세계관의 국가정보원 같은 조직인데, 이 기관에 의해 훈련된 요원이 버려진다는 설정 자체가 이미 이 영화의 분위기를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저는 이 캐릭터 구성이 처음엔 꽤 신선하다고 느꼈습니다. 각자가 국가나 조직의 도구로 소모되었다가 버려진 이들, 그 공통점 하나만으로 묶인 팀이라는 설정이 기존 어벤저스와는 확실히 결이 달랐습니다. 실제로 저도 대학 시절 그 팀 프로젝트에서 비슷한 감각을 경험했습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아 남겨진 조합이 오히려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며 예상 밖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험이요.
센트리라는 존재와 보이드의 의미
이 영화에서 가장 복잡한 캐릭터는 단연 밥, 즉 로버트 레이놀즈입니다. 그는 센트리 프로젝트(Sentry Project)의 생존자로, 인체 실험을 통해 초인적인 힘을 얻었지만 그 자신은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인물입니다. 어린 시절 가정폭력에 노출되었고 약물 이력도 있었으며, 자존감이 바닥인 채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센트리 프로젝트(Sentry Project)란 인간을 대상으로 초능력을 부여하는 군사 실험 프로그램을 가리킵니다. 영화에서는 발렌티나가 탄핵 청문회를 앞두고 이 프로젝트의 존재를 은폐하려 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SF 설정이 아니라 권력의 책임 회피를 상징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밥이 보이드(Void)로 변해 도시 전체를 삼키려 할 때, 엘레나가 그 안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보이드란 센트리의 어두운 내면이 외부로 폭발한 상태로, 쉽게 말해 억눌린 자기혐오와 고통이 물리적인 형태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엘레나가 그 공간 안에서 밥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저는 그게 영웅의 용기가 아니라 같은 외로움을 가진 사람의 본능적인 반응처럼 보였습니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어린 시절 트라우마(trauma)와 방치 경험은 성인기 자기 효능감 저하와 해리 증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여기서 트라우마(trauma)란 심리적 충격으로 인해 정상적인 적응 기능이 무너진 상태를 의미하는데, 밥의 보이드는 그 상태의 극단적인 시각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팀워크가 완성되는 조건, 그리고 영화의 한계
썬더볼츠라는 팀명은 엘레나가 어린 시절 뛰었던 오합지졸 어린이 축구팀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작명 장면 하나가 이 영화의 정서를 압축합니다. 잘 만들어진 엘리트 팀이 아니라, 상처를 공유한 사람들이 우연히 하나의 이름 아래 모인 것이라는 감각이죠.
제 경험상 이 감각은 꽤 현실적입니다. 제가 우수상을 받았던 그 프로젝트 팀도 처음엔 합이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발표 공포증이 있던 동기가 대본을 수십 번 읽으며 무대 위에서 손을 떨면서도 끝까지 발표를 마쳤을 때, 그게 우리 팀의 가장 강한 순간이었습니다. 썬더볼츠도 비슷합니다. 케미스트리(chemistry)가 완성되는 건 서로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약점을 받아들이기로 한 순간이었습니다. 케미스트리란 팀원 간 상호작용이 시너지를 발생시키는 상태를 뜻하는데, 이 영화는 그 과정을 꽤 설득력 있게 그려냅니다.
그러나 비판적으로 보면, 이 영화가 끝까지 그 설득력을 유지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개연성 측면에서 아쉬운 부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서로가 서로의 표적이었던 캐릭터들이 한 팀이 되는 과정이 지나치게 빠르게 처리됩니다.
- 후반부 센트리의 보이드 전개는 서사의 균형을 무너뜨리며 초반의 감성적 톤을 희석시킵니다.
- 발렌티나라는 빌런이 탄핵 청문이라는 현실적인 장치로 등장하지만, 결말에서 그녀를 처리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가볍습니다.
MCU에서 안티히어로(anti-hero) 서사가 성공하려면 내러티브 일관성(narrative coherence)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안티히어로란 전통적인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나 있으나 독자나 관객의 공감을 얻는 주인공 유형을 말하고, 내러티브 일관성이란 이야기의 논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흥행 수익과 관객 반응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MCU 작품 중 캐릭터 중심 서사를 유지한 작품일수록 평론가 점수와 관객 만족도가 모두 높은 경향이 있었습니다(출처: Rotten Tomatoes).
버려진 자들이 뉴 어벤저스가 된 아이러니
결말에서 발렌티나는 기자들 앞에 이들을 뉴 어벤저스(New Avengers)로 소개합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웃음이 나왔다가 바로 씁쓸해졌습니다. 소각로에 버려졌던 사람들이 다음 날 시리얼 광고를 찍는다는 전개가 현실의 어떤 구조를 꽤 정확하게 풍자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조직이 필요할 때 쓰고 필요 없을 때 버리지만, 어떤 계기로 다시 필요해지면 공식 얼굴로 내세우는 구조 말이죠.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결말이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니라 냉소적 현실주의에 가깝다고 봅니다. 현재 캡틴 아메리카인 샘 윌슨이 어벤저스 상표권을 등록하며 불만을 표시했다는 장면까지 포함하면, 영화는 영웅주의(heroism)가 결국 브랜드 관리의 문제로 귀결되는 세계를 조심스럽게 그리고 있습니다.
판타스틱 4의 우주선이 대기권으로 진입하며 영화가 끝나는 방식은 전형적인 MCU의 확장 전략입니다. 이 방식을 좋게 보는 분들도 있고, "또 이러네"라고 피로감을 느끼는 분들도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전에 쌓아 올린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좀 더 온전히 마무리되었더라면, 그 열린 결말이 훨씬 더 반가웠을 것입니다.
썬더볼츠는 훌륭한 재료를 가진 영화입니다. 그 재료를 끝까지 잘 다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릴 수 있습니다. 직접 보고 나서 판단하시되, 적어도 엘레나와 밥의 장면만큼은 극장에서 확인할 가치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MCU가 다음에 이 팀을 어디에 배치할지, 그리고 그때는 서사의 완성도를 좀 더 챙길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이 지금으로선 가장 합리적인 기대치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