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창 시절 국사 시간에 '제5공화국'이라는 단어를 교과서에서 읽었을 때는 솔직히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한 편이 그 시절을 제 가슴속으로 끌고 들어왔습니다. 영화 《변호인》은 1981년 부산에서 실제로 벌어진 부림사건을 바탕으로, 한 세무 변호사가 인권변호사로 각성하는 과정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건, '이게 역사가 아니라 지금 내 이야기 같다'는 묘한 공포였습니다.
부림사건: 책 읽었다는 이유로 잡혀간 사람들
1981년 부산에서 독서모임을 하던 대학생과 회사원들이 영장도 없이 체포됐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부림사건입니다. 여기서 부림사건이란, 부산 지역 독서모임 회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공안 사건으로, 당시 검거된 인원만 22명에 달했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법정 장면이었습니다. 피고인들은 포승줄에 묶인 채 재판정에 들어섰고, 변호인이 형사소송법 제280조를 들어 즉각 수갑과 포승을 풀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형사소송법 제280조란 공판정, 즉 재판이 열리는 법정에서 피고인의 신체를 구속하지 못한다는 규정입니다. 재판도 시작 전에 포승줄을 차고앉아 있는 청년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유죄 낙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더 황당했던 건 증거였습니다. 검찰이 제출한 주요 증거는 자술서, 즉 피고인 스스로 작성했다는 자백 진술서였습니다. 그런데 피고인 몸에는 타박상 흔적이 가득했고, 이는 명백한 고문의 흔적이었습니다. 헌법 제12조와 형사소송법 제310조는 자백만으로는 유죄를 입증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형사소송법 제310조란 피고인의 자백이 유일한 증거인 경우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조항으로, 자백 강요를 막기 위한 핵심 안전장치입니다. 그런데 법정에서 수사관은 "국보법 사건은 자백에 포커스를 맞춰 수사한다"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장면은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과장처럼 느껴지기 마련인데, 이게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한다는 사실이 더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불온서적 감정, 즉 특정 서적이 체제에 위협이 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절차도 법정에서 낱낱이 해체됩니다. 영화 속 변호인은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불온서적으로 감정한 증인에게 영국 외교부의 공식 서한을 제시합니다. 이 책의 저자 에드워드 카가 영국을 위해 헌신한 외교관이자 존경받는 역사학자임을 밝히는 내용이었습니다. 서울대학교 권장도서에도 올라 있던 책이 불온서적으로 둔갑하는 상황, 저는 그 장면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영화 속 법정에서 드러난 절차 위반 사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영장 없는 선 체포, 후 영장 발부라는 위법 수사 절차
- 최대 두 달이 넘는 불법 구금 및 피의자 보호자 미통보
-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을 유일한 증거로 활용
- 전문성이 결여된 불온서적 감정 결과를 그대로 재판에 적용
한 변호사의 각성: 국가는 누구인가
영화의 진짜 무게는 주인공 송우석 변호사의 변화에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세무 변호사로서 돈 잘 버는 것이 최우선이었고,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들은 귀찮은 소리로 여겼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오히려 공감했던 부분도 바로 거기였습니다. 저도 일상에 치여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평범한 사람 중 하나니까요.
그런 그가 구치소에서 피멍투성이 청년들을 마주하고, 그 어머니의 눈물을 보는 순간 무언가 뒤집어집니다. 이후 그는 법정에서 직접 증인석의 수사관에게 묻습니다. "증인이 말하는 국가란 대체 뭡니까?" 그리고 스스로 답합니다. 헌법 제1조 제2항, 즉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을 외치며, 국가란 국민이라고 선언합니다. 헌법 제1조 제2항이란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 원리인 국민주권주의를 명시한 조항으로, 국가 권력의 정당성이 국민에게서 비롯된다는 뜻입니다. 그 장면을 보며 제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는 걸, 솔직히 고백합니다.
물론 이 영화를 향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합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화를 모티브로 삼다 보니, 인물이 지나치게 영웅주의적으로 그려졌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또 공권력을 대변하는 인물들이 입체성 없이 절대악으로만 묘사되면서, 당시 시대가 지닌 구조적 모순보다 개인의 잔혹함으로 단순화됐다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저도 이런 시각에 일정 부분 동의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 자체의 가치가 그 한계를 충분히 상쇄한다고 봅니다.
한국 현대사 연구자들은 부림사건을 군사정권 초기 공안통치의 전형적 사례로 평가합니다. 당시 국가보안법은 명확한 구성요건 없이 광범위하게 적용됐으며, 이는 이후 수많은 인권 침해 사건의 법적 근거로 악용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또한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이후 재심 절차를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대한민국 법원은 당시 수사 과정의 위법성을 공식 인정했습니다(출처: 대법원 종합법률정보).
마무리하자면, 《변호인》은 단순한 실화 기반 법정 드라마가 아닙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고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겨둔 질문은 하나입니다. 지금 내가 사는 사회에서, 나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을 때 외면하지 않는 사람인가.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은 분이라면, 꼭 한 번 직접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법과 정의, 그리고 국가의 의미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게 되는 두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법률적 조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