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몸 안에 내가 아닌 존재가 살고 있다면 어떨까요. 2018년 개봉한 마블 영화 베놈은 바로 그 질문 하나로 두 시간을 밀어붙입니다. 처음 봤을 때 "이게 히어로 영화 맞나?" 싶었는데, 지금 다시 꺼내보면 그게 오히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우주에서 온 불청객, 심비오트란 무엇인가
영화는 라이프 재단 소속의 우주선이 외계 생명체를 싣고 귀환하다 추락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핵심 존재가 바로 심비오트(Symbiote)입니다. 심비오트란 단독으로는 생존하기 어렵고 반드시 살아있는 숙주의 몸에 기생하며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하는 외계 생명 유기체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기생과 공생의 경계 어딘가에 존재하는 생물인데, 숙주와의 상성이 맞지 않으면 숙주가 사망에 이를 만큼 위험합니다.
저는 처음에 이 설정을 SF적 과장이라고 가볍게 봤습니다. 그런데 직접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자연계에도 숙주를 바꿔가며 생존하는 기생 유기체는 실제로 존재하고, 심비오트의 설정이 완전한 허구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라이프 재단의 드레이크는 심비오트와 인간의 공생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노숙자들을 무단으로 데려와 임상시험을 강행합니다. 임상시험(Clinical Trial)이란 신약이나 새로운 치료법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인간에게 직접 검증하는 절차를 뜻합니다. 동의 없이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한 이 실험은 명백한 연구 윤리 위반이고, 영화가 빌런을 설정한 방식 중 가장 현실적으로 섬뜩하게 느껴진 부분이었습니다.
에디 브록이 베놈을 만나는 순간
리포터 에디 브록은 라이프 재단의 비밀을 취재하다가 실험실에 잠입하고, 그 과정에서 노숙자의 몸에 기생하던 심비오트가 자신에게 전이되어 버립니다. 이 장면이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입니다. 영웅이 되기를 선택한 게 아니라, 그냥 어쩌다 엮여버린 거니까요.
베놈과 결합한 이후 에디의 몸 상태는 급격히 변합니다. 체온이 오르고,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고, 초인적인 힘이 발현되는가 하면 특정 주파수에는 극도의 고통을 느낍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공명 주파수(Resonance Frequency)입니다. 공명 주파수란 특정 물체나 유기체가 외부 진동에 반응하여 에너지를 최대로 흡수하게 되는 진동수를 의미합니다. 영화에서 심비오트가 특정 음파에 치명적으로 반응하는 설정은 이 원리를 빌려온 것으로, MRI 기기가 만들어내는 강한 전자기파와 소리가 베놈을 에디와 강제로 분리시키는 장면에서 과학적 개연성을 어느 정도 확보합니다.
제가 직접 느낀 건데, 에디가 베놈 때문에 횡설수설하고 냉장고 속 음식을 허겁지겁 집어먹는 장면들이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라 숙주-기생체 상호작용이 빚어내는 혼란을 꽤 잘 표현한 것 같았습니다. 몸을 공유하되 의지는 충돌하는 상황, 그게 이 영화 전반의 핵심 긴장감이었으니까요.
외계인 손 증후군, 현실의 베놈
영화를 보고 나서 저는 꽤 오래 이 질문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내 몸인데 내 뜻대로 안 되는 느낌, 현실에도 있을까? 그리고 실제로 있었습니다.
외계인 손 증후군(Alien Hand Syndrome)이란 한쪽 손이 환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신경학적 질환입니다. 뇌의 두 반구를 연결하는 뇌량(Corpus Callosum)에 손상이 생길 때 주로 발생하는데, 뇌량이란 좌뇌와 우뇌 사이에서 신호를 주고받는 신경 다발로, 이 구조가 손상되면 두 반구가 서로 다른 명령을 내리는 상태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한쪽 손이 다른 손의 행동을 방해하거나 스스로 물건을 집고, 심지어 자신의 목을 조르는 사례까지 보고된 바 있습니다.
실제로 보고된 사례들을 보면 환자들이 "내 몸 안에 나를 싫어하는 존재가 사는 것 같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이 내용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소름이 돋았습니다. 베놈이 에디의 팔을 제멋대로 뻗어 공격하는 장면이 갑자기 웃기지 않게 느껴졌거든요.
해리성 정체감 장애(DID,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를 경험하는 일부 환자들은 내면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리는데, 처음에는 침입자처럼 두렵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존재가 오히려 위험을 경고하거나 결정을 도와주는 파트너처럼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에디와 베놈의 관계 변화와 구조적으로 너무 닮아있어서, 이 영화의 기획자들이 이런 심리 사례를 참고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에 따르면 해리성 장애는 전 세계 인구의 약 1~3%가 경험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출처: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
베놈의 한계와 그래도 남는 것
솔직히 말하면 저는 베놈의 빌런 설정에는 아쉬움이 꽤 컸습니다. 칼튼 드레이크가 라이엇(Riot)이라는 심비오트와 결합해 최종 보스로 등장하는데, 이 라이엇이 가진 서사가 너무 얕습니다. "더 많은 심비오트를 데려와 지구를 정복하겠다"는 목표는 전형적인 악역 공식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베놈이 갑작스럽게 지구 편이 되기로 결심하는 과정도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네가 낙오자라서 마음에 들었다"는 대사 하나로 심경 변화를 설명하는데,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관객이 많은 건 당연한 반응입니다. 더 많은 복선과 감정선을 쌓았더라면 이 장면이 훨씬 묵직하게 남았을 텐데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시리즈로 이어질 수 있었던 건 단 하나, 톰 하디의 연기 때문입니다. 안티히어로(Anti-Hero)란 전통적인 영웅의 덕목인 도덕성이나 이타심 없이도 주인공 역할을 하는 캐릭터 유형을 말합니다. 에디 브록은 정의롭고 싶지만 상황에 치이고, 베놈은 악하지만 에디에게 묘하게 정이 들어버립니다. 이 두 존재가 만들어내는 캐릭터 케미스트리가 서사의 빈틈을 상당 부분 메웁니다.
베놈의 주요 장단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에디와 베놈의 버디 무비식 케미스트리, 코믹하면서도 감정선이 살아있음
- 톰 하디의 몸을 쓴 연기, 심비오트와의 신체 공유를 표현하는 방식이 독창적
- 빌런 라이엇의 서사 빈약, 최종 대결의 긴장감이 상대적으로 낮음
- 15세 관람가 수준에 맞춘 연출로 원작 팬들이 기대한 잔혹미 부재
- 심비오트의 심경 변화에 대한 서사적 근거 부족
2018년 박스오피스 기준으로 베놈은 전 세계 8억 5,000만 달러 이상의 흥행 수익을 기록했습니다(출처: Box Office Mojo). 평단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이 수치가 나왔다는 건, 결국 캐릭터의 힘이 서사의 약점을 이겼다는 방증일 겁니다.
베놈은 완벽한 영화가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두 번, 세 번 다시 꺼내보게 되는 건 에디와 베놈이 나눠갖는 그 기묘한 우정 때문입니다. 완성도를 따지기 전에 그 캐릭터가 먼저 기억에 남는 영화, 이것만으로도 베놈은 볼 이유가 충분합니다. 심비오트 장르를 처음 접하신다면 속편보다 이 첫 번째 작품부터 보시길 권합니다. 두 존재가 처음 서로를 받아들여 가는 과정이 여기에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