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장에서 나오는 길에 코트 지퍼를 잠그다가 잠깐 멈췄습니다. 겨우 2월의 칼바람이었는데, 스크린 속 사내가 맨몸으로 설원을 기어가던 장면이 자꾸 머릿속에 걸렸거든요. 저는 그날 이후 한동안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압도적인 영상 앞에서 느꼈던 전율과, 끝나고 나서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몇 가지 의문이 한데 뒤섞였기 때문입니다.
자연광 촬영이 만들어낸 세계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촬영 내내 인공조명을 배제하고 오직 자연광(natural light)만으로 화면을 구성했습니다. 자연광 촬영이란 스튜디오 조명이나 별도의 인공 광원 없이 태양광·달빛 등 환경에 존재하는 빛만으로 피사체를 담는 방식입니다. 영화사에서도 이 정도 규모의 장편 극영화에 자연광을 전면 적용한 사례는 매우 드뭅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이게 진짜 CG가 없는 게 맞나?"였습니다. 저녁 무렵 들판을 가득 채우는 황금빛이나, 새벽 직전 숲이 짙은 남색으로 잠기는 순간들이 워낙 생경했기 때문입니다.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했고, 저도 그 선택이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압도적인 영상미가 서사의 빈약함을 일부 가려주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자연광이 만들어내는 감각적 몰입감이 너무 강하다 보니, 156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이야기 자체는 단순한 생존과 복수의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 후반부에 가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영상이 이렇게 좋으니까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영상이 오히려 관객의 비판적 시선을 흐트러뜨린다는 쪽이 더 솔직한 감상이었습니다.
자연광 촬영이 영화 전체에 미친 영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허무는 시각적 몰입감 극대화
- 19세기 미국 서부의 질감과 혹독함을 현실감 있게 재현
- 배우의 신체 연기가 조명의 개입 없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효과
- 촬영 가능한 시간이 하루 1~2시간으로 제한되어 제작 기간이 9개월 이상 소요
원주민 서사의 한계
저는 이 영화를 두 번 봤는데, 두 번째 볼 때는 의도적으로 아리카라족(Arikara) 캐릭터들을 집중해서 지켜봤습니다. 아리카라족이란 미주리강 유역에 거주하던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으로, 영화 속에서는 주인공 일행과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집단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관람에서는 아무래도 불편함이 앞섰습니다. 아리카라족 캐릭터들은 딸을 빼앗긴 추장의 서사를 제외하면, 대부분 백인 주인공의 생존 경로를 위협하거나 구원하는 역할로만 기능합니다. 입체적인 개인 서사가 있는 게 아니라, 주인공 휴 글래스의 여정이 더 극적으로 보이도록 배치된 배경 요소에 가깝습니다.
이 지점은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분들 사이에서 꾸준히 거론됩니다. 서구 열강의 아메리카 대륙 침탈이라는 식민주의(colonialism) 역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그 역사의 당사자인 원주민들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식민주의란 외부 세력이 다른 집단의 영토와 자원을 지배·수탈하는 구조를 가리키며, 19세기 미국 서부 개척사는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실제로 미국 원주민의 역사적 피해를 다룬 연구에 따르면,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도착 이후 수백 년에 걸친 인구 감소와 강제 이주의 규모는 전례 없는 수준이었습니다(출처: 미국 국립아메리카인디언박물관). 이러한 역사적 무게를 이 영화가 충분히 담아냈는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회의적입니다.
물론 이냐리투 감독이 원주민 배우들을 직접 섭외하고, 라코타 어·아리카라어 등 실제 언어를 영화 속에 재현한 점은 일정 부분 성의 있는 접근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사 구조 자체가 백인 주인공의 구원 서사를 중심으로 설계된 이상, 그 언어적·외형적 고증이 근본적인 한계를 상쇄하지는 못한다는 게 저의 판단입니다.
실화가 주는 생존의 무게 — 줄리안 쾨프케와의 비교
영화가 끝나고 나서 저는 한동안 "이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휴 글래스의 생존이 현실적 개연성의 경계를 넘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실화 생존 사례들을 찾아보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1971년, 페루 아마존 상공에서 LANSA 508편이 낙뢰를 맞아 고도 3,000m에서 공중 분해되었습니다. 이 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당시 17세였던 줄리안 쾨프케(Juliane Koepcke)입니다. 그녀는 좌석에 안전벨트가 묶인 채 열대우림 한복판으로 추락했고, 쇄골 골절과 찰과상만 입고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저는 이 사례를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기록된 사실입니다. 쾨프케는 생물학자였던 부모에게서 배운 생존 지식을 바탕으로 11일 동안 아마존 정글을 걸어 나왔습니다. 상처에 구더기가 들끓자 발견한 보트의 연료유를 상처에 적용해 유충을 제거하는 응급 창상 처치(wound debridement)를 스스로 시행했습니다. 창상 처치란 감염된 상처에서 괴사 조직이나 이물질을 제거하는 의료 행위를 가리키는데, 그녀는 의료 도구도 없이 이 과정을 혼자 버텨냈습니다.
쾨프케의 생존 방식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공황 상태를 억제하고 체계적으로 판단했다는 점입니다. 항공 사고 생존자의 심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발생률은 일반 외상 사건 대비 유의미하게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출처: 미국 국립보건원 NLM), 그런 극한 상황에서 그녀가 유지한 냉정함은 단순한 체력이나 운이 아니었습니다.
<레버넌트>의 휴 글래스가 복수라는 감정적 동력으로 살아남았다면, 쾨프케는 지식과 판단력으로 살아남았습니다. 두 생존 방식 중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느냐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겠지만, 저는 두 이야기 모두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대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고 생각합니다.
<레버넌트>는 분명히 한 번은 봐야 할 작품입니다. 자연광 촬영이 만들어낸 영상의 질감은 어떤 설명으로도 대신하기 어렵고, 디카프리오의 신체 연기는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다만, 영상미에 압도되기 전에 이 영화가 어떤 역사적 맥락 위에 서 있는지를 한 번쯤 생각해 보신다면, 보고 나서의 여운이 좀 더 입체적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줄리안 쾨프케의 실화도 함께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영화보다 조용하지만, 훨씬 오래 남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