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0년을 살아남은 마녀 사냥꾼이라는 설정,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솔직히 "이 소재라면 좀 제대로 만들어야 하는데"라는 기대부터 앞섰습니다. 빈 디젤 주연의 판타지 액션 영화 라스트 위치 헌터는 중세 흑사병 시대부터 현대 뉴욕까지를 가로지르는 방대한 다크 판타지 세계관을 품고 있습니다. 비주얼과 설정만큼은 분명 A급인데, 각본은 그 기대를 충분히 받쳐줬을까요.
800년의 세계관, 설정만큼은 압도적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흑사병(Black Death) 시대는 실제 역사에서도 유럽 전체 인구의 30~60%를 앗아간 재앙이었습니다. 14세기 중반의 일인데, 이 공포스러운 역사적 사건을 마법적 세계관의 기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영화의 출발은 꽤 영리합니다. 저는 이 설정을 처음 접했을 때 역사적 개연성이 단단하게 깔려 있어서 몰입이 한결 수월했습니다.
주인공 코울더가 받은 불멸의 저주, 즉 임모탤리티(Immortality) 저주는 단순한 영생이 아닙니다. 여기서 임모탤리티란 죽음을 초월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그 능력이 마녀 위치 퀸의 생명과 연동되어 있다는 반전 장치로 작동합니다. 저주를 걸었던 마녀가 완전히 죽지 않았기에, 코울 더도 죽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설정 자체의 완성도는 상당히 높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역사 속에도 이와 놀랍도록 유사한 기록이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16세기 이탈리아 프리울리 지방에서 종교재판을 통해 발굴된 베난단티(Benandanti) 기록이 그것입니다. 베난단티란 '선한 보행자'를 뜻하며, 영혼이 몸을 이탈해 마녀와 영적 전투를 벌인다고 주장한 이들을 가리킵니다. 수십 명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동일한 디테일을 증언한 종교재판 기록이 현재까지 남아 있습니다(출처: 이탈리아 역사 아카이브 – 프리울리 종교재판 기록). 제가 이 기록을 처음 읽었을 때, 영화의 설정이 그냥 작가의 상상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속 세계관의 핵심 구조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마녀들은 인간 사회에 숨어 지내며, 인간에게 흑마법 사용을 금하는 절대 규칙을 따름
- 위치 크로스(Witch Cross) 조직이 이 규칙을 어긴 마녀들을 처리
- 코울 더는 800년간 이 조직 아래에서 활동하는 인류 최강 마녀 사냥꾼
서사와 캐릭터, 아쉬운 부분을 짚어보면
설정이 탄탄한 것과 달리, 내러티브 아크(Narrative Arc)에서는 아쉬움이 두드러집니다. 내러티브 아크란 이야기가 도입부에서 절정, 결말로 이어지는 전체적인 흐름과 곡선을 말합니다. 이 영화의 아크는 중반부를 지나면서 꽤 예측 가능한 경로로 흘러갑니다. 신뢰하던 조직 내부의 배신자, 주인공을 막아서는 봉인된 악의 부활, 마지막 결전. 솔직히 저는 중반쯤에서 결말의 윤곽을 거의 다 그릴 수 있었습니다.
캐릭터 활용 면에서는 더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마이클 케인과 일라이저 우드 같은 배우들을 캐스팅해 놓고, 그들의 캐릭터를 주인공의 조력자 역할에만 국한시킨 것은 분명한 낭비입니다. 특히 마이클 케인이 연기한 캐릭터는 서사 초반의 축 역할을 하다가 이후 급격히 비중이 줄어드는데, 배우의 존재감에 비해 활용도가 너무 낮다고 느꼈습니다.
빈 디젤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배우 특유의 중저음 보이스와 과묵한 액션 스타일이 코울 더라는 캐릭터와 잘 맞는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솔직히 분노의 질주의 도미닉 토레토가 마법 세계로 이동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이것을 캐릭터의 연속성으로 볼 것인지, 배우의 한계로 볼 것인지는 보는 분마다 다를 것 같습니다.
영화 장르적으로는 어반 판타지(Urban Fantasy) 계열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어반 판타지란 현대 도시를 배경으로 마법이나 신화적 존재를 등장시키는 서브 장르를 뜻합니다. 이 장르의 대표작으로 자주 언급되는 콘스탄틴과 비교해 보면, 라스트 위치 헌터는 시각적 완성도나 세계관 구축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다만 주인공의 내면 갈등과 심리적 긴장감이 상대적으로 옅은 것이 깊이 차이를 만든다고 봅니다.
속편이 나온다면, 무엇이 보완되어야 할까
라스트 위치 헌터는 흥행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세계관 자체가 시리즈물로 이어질 잠재력을 충분히 갖고 있습니다. 만약 속편이 제작된다면 저는 크게 세 가지가 보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 월드 빌딩(World Building)의 확장: 마녀들의 사회 구조와 내부 정치, 절대 규칙의 역사적 배경 등이 더 구체적으로 다뤄져야 설정의 무게감이 살아남습니다. 여기서 월드 빌딩이란 창작물 안에서 독자적인 세계의 규칙과 역사를 구축하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 캐릭터 앙상블의 심화: 조력자 캐릭터들에게 독립적인 동기와 서사를 부여해야 합니다.
- 심리적 갈등 레이어: 800년을 산 존재가 겪을 수밖에 없는 고독, 상실, 도덕적 딜레마를 전면에 꺼내야 합니다.
실제로 할리우드 어반 판타지 시리즈들은 후속작에서 세계관을 확장할수록 팬덤이 견고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화 시리즈와 원작 IP(지적재산권) 가치에 관한 연구에서도 세계관의 일관성과 확장성이 프랜차이즈 흥행의 핵심 변수로 꼽힙니다(출처: 미국 영화 산업 조사기관 Box Office Mojo).
라스트 위치 헌터는 분명 결점이 있지만, 저는 이 영화가 아직 가능성을 다 소진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800년의 역사를 품은 세계관이 단 한 편으로 끝나기엔, 솔직히 그 설정이 너무 아깝습니다. 킬링타임용 판타지 액션으로 한 번 보고 끝내기에는 아까운 소재이고, 제대로 된 속편이 나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같은 어반 판타지 장르에 관심이 있다면 콘스탄틴과 함께 비교하며 보는 것도 꽤 재미있는 감상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