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그냥 이연걸의 무술 쇼케이스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2001년작 영화 <더 원>은 멀티버스라는 개념을 액션에 접목한 꽤 야심 찬 기획이었는데, 당시 저는 그 설정의 깊이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다시 들여다보니, 이 작품이 얼마나 앞서 나간 아이디어를 품고 있었는지 새삼 놀랍습니다.
멀티버스 설정, 얼마나 신선했나
혹시 '평행 우주 속의 나'라는 개념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 질문이 처음으로 실감 있게 와닿았습니다.
영화의 핵심 설정은 멀티버스(Multiverse)입니다. 멀티버스란 우리가 사는 우주 외에도 수많은 평행 우주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이론으로, 각 우주마다 동일한 인물의 또 다른 버전이 살아가고 있다는 개념입니다. 영화 속 악당 유 로우는 이 사실을 이용해 각 우주를 넘나들며 2년 동안 자신의 분신 103명을 처치했습니다. 다른 차원의 자신을 제거할수록 그 에너지를 흡수해 초인적인 힘을 얻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인 에너지 보존 법칙을 영화 식으로 해석한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에너지 보존 법칙이란 물리학에서 에너지는 새로 생기거나 사라지지 않고 형태만 바뀐다는 원리인데, 이 영화는 멀티버스 속 자아들이 하나의 총량을 나눠 갖고 있다는 방식으로 이 원리를 SF적으로 비틀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식으로 물리 이론을 장르 문법 안에 자연스럽게 녹인 2000년대 초반 SF 액션 영화는 드물었습니다.
실제로 멀티버스 이론은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 분야에서 제기된 '다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에 근거합니다. 다세계 해석이란 양자적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우주가 분기하여 모든 가능성이 별개의 우주에서 실현된다는 이론으로, 1957년 물리학자 휴 에버렛 3세가 처음 제안했습니다. 이 이론은 현재까지도 물리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습니다(출처: NASA Science).
이연걸 1인 2역, 무술 철학의 충돌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인 부분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단연 이연걸이 선악의 두 캐릭터에 서로 다른 무술 철학을 입힌 장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직접 몇 번이나 되돌려 봤는데, 이 부분은 정말 예상 밖이었습니다. 단순히 한 배우가 두 역할을 맡은 게 아니라, 선악의 철학적 차이를 몸의 언어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꽤 정교한 기획이었습니다.
악당 유 로우는 형의권(形意拳)을 구사합니다. 형의권이란 직선적이고 폭발적인 타격을 중시하는 중국 전통 무술로, 최단 거리로 힘을 집중하여 상대를 무너뜨리는 데 특화된 권법입니다. 반면 주인공 게이브는 팔괘장(八卦掌)을 씁니다. 팔괘장이란 원형의 동선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이며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무술로, 유연함과 흐름을 통해 강함을 제압한다는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노자적 사상을 클라이맥스 전투에서 시각적으로 풀어낸 셈입니다.
이연걸의 할리우드 출연작 중에서도 이처럼 무술의 철학적 차이를 서사와 연결한 작품은 사실 많지 않습니다. 영화 평론 측면에서도 이 지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부분입니다. 이연걸은 홍콩 무술 영화의 전통에서 성장한 배우로, 그의 무술 실력은 단순한 연기 기술을 넘어 중국 전통 무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합니다(출처: IMDb).
이 영화에서 무술 스타일의 대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유 로우: 형의권 — 직선 타격, 파괴적, 최단 거리 권법
- 게이브: 팔괘장 — 원형 동선, 부드러운 흐름, 힘을 역이용하는 수비형 권법
- 결과: 소프트 권법이 하드 권법을 이기는 구조로 서사가 완성됨
멀티버스의 원조, 아쉬움도 원조
그렇다면 이 영화는 왜 지금도 완성작으로 기억되지 못할까요? 제 경험상 이건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연출의 문제였습니다.
방대한 평행 우주 설정을 가져다 놓고도, 결국 영화는 전형적인 추격전과 힘의 대결로 귀결됩니다. 멀티버스라는 소재가 품고 있는 철학적 질문, 예컨대 "또 다른 나는 나인가, 타인인가"라는 자아 정체성의 문제나 "우주의 균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가장 아쉬웠던 지점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여기에 더해 CG(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한계도 작품의 완성도를 갉아먹었습니다. 물론 2001년 당시의 기술 수준을 지금 기준으로 단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 시각에서는, 슬로 모션과 와이어 액션의 과도한 사용이 이연걸 특유의 실사 무술이 가진 속도감과 현장감을 오히려 약화시켰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괴테의 이야기가 떠오른 것도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였습니다. 1771년 괴테는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자신과 꼭 닮은 기사를 목격했고, 8년 뒤 그 기사가 입었던 옷을 자신이 실제로 입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기록이 그의 회고록에 남아 있습니다. 이를 도플갱어(Doppelganger)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도플갱어란 본인과 동일한 외모를 가진 분신이 나타나는 현상을 뜻하는 독일어로, 예로부터 불길한 징조로 여겨져 왔습니다. 영화 속 유 로우와 게이브의 관계가 이 개념과 묘하게 겹쳐 보이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영화의 아쉬움을 정리하면, 멀티버스라는 당대 최첨단 소재를 가져와 킬링타임용 액션 공식에 가두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마블과 DC가 멀티버스를 전면에 내세우기 20년 전에 이 소재를 먼저 꺼낸 작품으로서의 역사적 의미는 분명히 있습니다.
<더 원>은 완성도 높은 명작이라기보다,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를 가졌지만 그것을 담을 그릇이 부족했던 작품입니다. 지금이라면 이 소재로 훨씬 깊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멀티버스 영화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이 작품을 그 장르의 원형으로 한 번쯤 짚고 넘어가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무술 영화 팬이라면 형의권과 팔괘장의 차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